▣ 음악/클래식

헨델의 음악

쥬 니 2011. 3. 25. 13:26

 

 

 
헨델 / Georg Fridrich Handel
1685 ~ 1759 , 독일 작곡가


 

 


수상음악 6. Allegro deciso (Alla Hornpipe)
London Symphony Orchestra
George Szell, Cond

 

 

 

1685년 같은 해에 세 사람의 악성이 탄생했는데
헨델, 바흐, 스카를라티의 순이었다.
 
바흐, 스카를라티와는 달리....
집안에 유명한 음악가는 한사람도 없는 가정에서 돌연변이처럼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보인 헨델이었으나 ,
외과의사가 겸업인 작센 공의 이발사였던 아버지는 법률가로 키우고 싶었다.
바흐가 음악가 집안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것 과는 달리
부유한 의사 집안에서 자랐으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18세에 고향을 떠나 함부르크에서 오페라 수업을 받았고
이탈리아에서 오페라가 유행하던 때에 20대 초반은
이탈리에서 오페라를 만들었다.
1710년에 처음으로 런던을 방문하였고, 그곳에서 음악
활동을 하면서 1726년에는 영국인으로 귀하했다.
영국에서 처음으로 오페라 작곡을 의뢰 받고
2주만에 쓴 <리날도>가 굉장한 호응을 받아
폭발적인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
 

 

"울게 하소서" 와 "사랑하는 나의 님" 은

바로크 오페라 중에서도 가장 사랑 받는 아리아이다.

특히, 이 두 아리아는 영화 "파리넬리"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1차 십자군 전쟁(1096~1099년) 말기 예루살렘 요새탈환을 둘러싼

기독교인들과 이슬람인들의 가상의 전쟁을 묘사한 서사시가 1574년작 '해방된 예루살렘'이다.  

헨델의 오페라 'Rinaldo'는 바로 이 서사시를 기초로 1711년에 완성된 '오페라 세리아'이다.

(Opera Seria: 그리스신화나 고대의 영웅담을 제재로 한 엄숙하고 비극적인 이탈리아 오페라)

   

 

 

 

Francesco Hayez Rinaldo and Armida

 

'Rinaldo and Armida' 의 줄거리

 

십자군 전쟁시대,

십자군 사령관 고프레도는 영웅 리날도에게 예루살렘 공략에 앞장서 달라고 부탁한다.

리날도는사령관의 딸 알미레나와 사랑을 속삭였으나, 마법사 아르미다가 나타나 알미레나를 납치해 간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고프레도는 선한 마법사가 도와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상심한 리날도를 위로한다.

알미레나를 찾아 떠난 고프레도와 리날도 일행은 인어들의 유혹적인 춤이 그들의 발을 멈추게 한다.

리날도는 그녀를 구출하러 가기 위해 마법의 배를 타게 된다.

 

한편 마술궁전에서 왕 아르간테가 알미레나의 환심을 사려하지만,

그녀는 홀로 그 유명한 “울게 하소서”라는 애절한 아리아를 부르면서 외면한다.

이슬람 마법사인 아르미다는 배에 타고 온 리날도를 해치려 하지만 오히려 첫눈에 반하여 구애를 하고

잠시동안 변신을 통해 사랑을 이룬다.하지만,

아르미다는 다시 리날도의 연인 알미레나를 해치려 하는 중 리날도가 막아서게 된다.

알미레나는 아버지와 연인을 다시 만난 것을 기뻐하고,

왕인 아르간테와 아르미다와 함께 벌인 결전에서 리날도의 승리로 끝나고 두 연인은 행복하게 맺어진다. 

 

이 줄거리나 설정은

결국 십자군을 신성한 고대 그리스 로마신화와 동일시했기에 그런지

예전에 포스팅했던 '오딧세이아'와 같은 서사시와도

또 '아도니스와 아프로디테의 사랑이야기' 와도 유사성이 드러난다.

 

 


 

Cara  Sposa

'사랑하는 나의 님'

 

 

 

사랑하는 아내여, 아름다운 아내여
그대는 어디에 있는가
아, 그대를 위하여 우는 자에게 돌아와 주오
암흑계에서부터 나는 너에게
내 분노의 불꽃으로 도전하겠다
오, 암흑의 정렬이여 !!
 

 

 

리날도가 부르는 '사랑하는 신부여'(Cara sposa)는 대표적인
바로크 오페라 중의 하나인 리날도의 제2막에서 부르는 아리아로
널리 알려진 곡이다.


Cara sposa, amante cara, dove sei?
Deh! ritorna a pianti miei!
Del vostro Erebo sull' ara
colla face del mio sdegno io vi sfido, O. spirti rei!

사랑하는 아내여, 아름다운 아내여, 그대는 어디에 있는가,
아, 그대를 위해 우는 자에게 돌아와 주오.
암흑계에서부터 나는 너에게 내 분노의 불꽃으로 도전하겠다.
오, 암흑의 정령이여!


 

 

그러나 행운은 오래 계속되지 않아 잠시 침체기에 빠져 있던

헨델은 1717년 영국왕 조지 1세가 템즈강에서 여는 파티를 위해
음악을 작곡했는데 바로 관현악곡 <수상음악>이었다.

 

이 작품이 의외로 큰 성공을 거두어서
헨델은 옛 명성을 다시 얻게 되었다.


  

 




 Friedrich Handel - Water Musis,Suite No.2
 
 
 

영국의 수도 런던의 테임스江
이 테임스江에서 뱃놀이를 즐기고 있는 광경을 보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헨델의 "수상음악"입니다.

이 "수상음악"은 지금부터 280여년 전 영국 왕실의 뱃놀이연회가 이 테임스강에서 개최되었을 때 연주되었다.
헨델은 바하와 동갑인 독일의 작곡가로 1710년 6월부터 하노버의
게오르그 선제후 (Georg, the Elector of Hanover) 의 악장의 지위를 맡고 있었는데
하노버에서는 장기(長技)인 오페라의 솜씨를 마음껏 발휘할 수가 없었으므로
취임하고 얼마 안되어 1년의 휴가를 얻어 영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영국에서 대성공을 한 후 일단은 하노버로 돌아왔으나
15개월 후 다시 휴가를 얻어 재차 영국의 땅을 밟았습니다.
그때도 전번과 같이 대호평을 받아 국왕인 앤여왕(Queen Anne)의 총애를 받고
완전히 런던이 마음에 든 그는 휴가가 끝난 후에도 하노버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1714년 49세의 앤여왕이 급서하고
그가 이제까지 의리를 저버리는 일을 거듭해 왔던 하노버의 게오르그 선제후가
영국의 왕위를 물려받아 조지 1세가 되었습니다.
 
헨델은 신국왕의 노여움을 두려워하며 근신하고 있었는데
 1717년 여름 테임스강에서 국왕의 뱃놀이 연회가 열려 그 때
친구인 킬만세기 남작(the Baron Kielmansegge)의 권고에 따라 신곡을 만들어
이것을 국왕이 탄 배 가까이에서 연주했습니다.
 50명의 연주자들이 탄 배가 국왕의 유람선을 따라가며
테임스강변의 람베드(Lambeth)에서 첼시(Chelsea)까지 왕복하는동안
약 한시간이 걸리는 전곡 연주를 세번이나
( 갈 때 두 번과 돌아올 때 한 번) 반복해서 연주했다고 합니다.

국왕은 이 음악이 마음에 들었고
그 작곡자가 헨델이라는 것을 알고는
그를 흔쾌히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앤여왕 이상으로 우대했다고 합니다.
 
일설에는, 조지 1세가 하노버 선제후 시절 자기가 영국 왕위를 계승하게 될 것을 알고
헨델을 미리 런던으로 장기간 휴가를 보냈으며
헨델이 휴가기간이 지난 후에도 돌아오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헨델이 어차피 독일에서나 영국에서나
자신을 위해 봉사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와 같이 작곡의 유래 그 자체에는 약간 의아스러운 곳도 있으나,
영국 왕실의 뱃놀이는 1715년과 1717년, 1736년의 3회에 걸쳐서 개최되었으며
그 때 헨델이 작곡한 음악을 모은 것이 오늘날 "수상음악"으로 전해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 곡은 전부 20곡 남짓의 소곡(小曲)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실외음악다운 낭랑한 울림의 음악으로 현악합주 이외에
혼이나 트럼펫같은 금관악기와 플루트, 오보에 등의 목관악기가 각각 효과적으로 사용되어 있고
남성적인 강함과 차분한 여성적 정서가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곡이 최초로 만들어졌을 때 헨델이 국왕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훌륭한 음악을 듣고서는 왕도 헨델을 용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717. 6. 17...당시의 국왕 죠지 1세 왕실의 템즈 강 위에서 파티의 흥을 돋구는 음악으로 연주

 

 

 


 

헨델의 음악은 전반적으로 보아 극적이다.
바흐와 같은 치밀성과 구성력이 결여된다는 비판도 받지만,
간결 명쾌하고 낙천성이 사람의 마음을 매료시킨다.

 

양감의 유례없는 효과적 표현이 바흐에게는 없는 해방감을 준다.
푸가와 같은 치밀한 곡에서도 도중에 화음을 울리기도하고
제시부를 되풀이해서 발전부를 생략하는 등
파격적인 스타일과 대범한 구성은 자유인답다

 
헨델은 46편의 오페라, 32편의 오라토리오, 수상음악
왕궁의 불꽃놀이,합주 협주곡 등 음악사에 빛나는 기악 작품들도 많이 남겼다.
낙천적이고 자유분방한 성격의 헨델은 그의 음악에서도
상쾌하고 신선하여 귀족들에게도,
무엇보다 일반 대중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살아 있는 동안 영국에서 대예술가로서의 위상을 인정받았던 헨델은

인간으로서나 예술가로서 평생 동안 그 명성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다른 음악가들과는 다른 독특한 존재였다.

 

 

 

 

왕궁의 불꽃놀이

 

이 곡은 1749년 봄,

영국과 프랑스와의 전란이 아텐에서 조정된 것을 축하하는 불꽃놀이를 위해 작곡된 작품이다.

이 야외 축전 음악은 1749년 4월 27일 런던 그린파크에서 열린 축하불꽃 대회에서 초연 되었다.

이 곡은 '수상음악'과 함께 아일랜드의 명 지휘자 해밀턴 하디의 편곡으로 된 것을 많이 연주한다.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의 원곡은 매우 길다. 불꽃을 쏘아올리기 전의 서곡.

불꽃과 불꽃 사이에 연주되는 무곡 풍의 여러 소곡으로 구성되어있다.

훗날 해밀톤 하티, 막스자이훼르트,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 등 여러 사람이 조곡으로 편곡했다.

 

서곡, d장조

1곡 overture

2곡 bourree

 

4분의 4박자의 장중한 느낌을 주는 느슨한 부분과,

3박자의 빠르고 화려한 부분으로 이루어져

장엄한 맛을 풍겨줍니다. 팀파니의 트레몰로로 시작하는프랑스 풍의 즐겁고 화려한 곡이다.

4분의4박자

프랑스에서 시작되 빠른 무곡, 고전 조곡에서 흔히 쓴다.

제 3악장 라르고 알라 시찰리아나, d장조 12분의8박자

한창 불꽃이 작열하는 가운데 연주 됩니다.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무곡이다.

아름다운 목가조이며 언제부터인가 온화하고 태평스런 분위기가 풍긴다 하여

 '평화(La Paix)'라는 이름이 붙었다.

 

제 4악장 환희. 알레그로, d장조 4분의4박자

'평화'와는 대조적인 밝은 곡이다.

화려한 트럼펫이 주주를 이루는 행진곡풍의 "환희(La Rejouissance)"란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끝으로 f단조의 미뉴엣과 b장조의 미뉴엣이 종곡을 이루고 있습니다.

미누에트 제1 제2의 2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국의 작곡가 퍼셀을 연상시키는 작풍(作風)이다.

이 웅장하고 화려한「왕궁의 불꽃 놀이 음악」은 야외음악의 최고 걸작으로서 음악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5곡 menuet 1.2r

 

 

헨델이 64세 때인 1749년에 작곡했으며「물의 음악 Water Music」과 함께

그의 만년을 장식하는 대표적인 관현악곡이다.

1749년 4월 27일, 런던의 그린 파크에서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체결된

평화조약을 축하하기 위해 대규모의 불꽃놀이 축제가 열렸다.

헨델은 이때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어「왕궁의 불꽃놀이 음악」을 작곡 연주했다.

이야기는 8년 전인 1740년 오스트리아의 황제 칼 6세의 서거(逝去) 무렵으로 돌아간다.

 

칼 6세에게는 아들이 없어 국본칙령(國本勅令=기본법을 이루는 조칙, pragmatic sanction)으로 가헌(家憲)을 정해

공주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중부 유럽, 벨기에, 이탈리아를 포함한 광대한 영토을 전부 상속시키도록 했다.

그러나 칼 6세가 죽자 상속권 싸움이 일어났다.

바바리아의 선제후(選帝侯)였던 칼알브레히트가 프랑스, 스페인, 프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오스트리아로 침공하여 빈의 마리아 테리지아를 내쫓고 1742년에 황제 자리에 올랐다.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의 시작이었다. 쫓겨난 마리아 테레지아는 친척인 헝가리의 도움을 얻어

바바리아, 프랑스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고국을 돌아왔다.

프러시아 왕 후페데리크와 평화조약을 맺었다.

 

한편 영국을 자기 편으로 끌어 들여 우위를 되찾았다.

그러한 영국과의 관계에 불만을 품은 프러시아가 얼마후 평화조약을 깨뜨리고 보헤미아로 쳐들어왔다.

마침 바바리아의 칼 알브레히트가 죽어서 오스트리아와 다시 협상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오스트리아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을 황제로 선임하여 모든 일을 일단락된 듯 했다.

그렇지만 마리아 테리지아 편을 들은 영국과 오스트리아에 적대했던 프랑스의 갈등이

마리아 테레지아의 상속을 구실 삼아 또 전쟁으로 표출되었다 전쟁은 8년이나 계속된 뒤에 간신히 끝났다.

비로소 두 나라는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1748년 7월 7일 에스 라 샤펠(아헨)에서 평화조약을 맺고 관계국은 모두 점령한 땅을 돌려 주었다.

이듬해 봄, 영국은 긴 전쟁에서 해방된 기쁨을 축하하기 위해 불꽃놀이를 계획했다.

 

불꽃은 카발리에레 세르반도니가, 음악은 헨델이 각기 담당했다.

헨델은 군악용 악기를 쓰라는 영국 황제 죠지 2세의 요구에 맞추어

트럼페트 9개, 호른 9개, 오보에 24개, 화고트 12개, 콘트라화고트 1개,

팀파니 3상, 작은 북 2개, 여기에 세르팡 sepent이라는

아직 영국에서는 낯선 저음악기까지 덧붙여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57인의 대합주 편성으로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을 만들었다. 더구나 초연에는 관악기를 늘려 100개 이상이나 사용했다고 한다.

불꽃놀이를 열기 1주일 전인 4월 21일 보크스 홀 가든에서 공개 연습을 할 때

1만 2천명의 군중이 모여들어 법석을 떨었다.

 

 

 

불꽃놀이는 실패했으나 음악은 축제를 화려하게 빛내

 

축제 당일은「왕국의 불꽃놀이 음악」의 서곡을 연주하고 101발의 캐논포가 울려퍼진 뒤,

불꽃이 올라가야 할 차례가 되었으나 모처럼 아름다운 거대한 성당 모양을 하늘에 그리려던 시도는 무산(霧散)되고

오히려 불꽃이 딴 곳으로 튀어 근처 건물을 태우는 소동만 일으켰다.

그리고 불꽃을 담당한 세르반도니는 울확 치민 나머지 칼을 뽑아들고 축제 집행관에게 덤벼들어 상처를 입히기까지 했다.

결국 사람들의 관심은「왕궁의 불꽃놀이 음악」으로 몰려 예기한 대로의 성공을 거두었다.

이미 64세였던 헨델은 3년 뒤인 1752년에는 장님이 되어 더 이상 작곡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있다가 1759년에 죽었으므로,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은 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화려한 무대였다.

축제를 치룬 후 헨델은 현악기를 보강하여 연주회용 관현악곡으로 고쳐 썼다.

그해 5월에 런던의 자선 음악회 때 이 개정판을 처음 공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