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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최영미 산문집

쥬 니 2010. 9. 6. 10:20

 

 

 

 

최영미 : 1961. 9월 서울 태생

( 저자 소개 :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152328 )

 

서울-> 일산->속초->춘천 생활

학생운동,  시인 등단,  혼자사는 삶......

 

 

작가의 삶과 생각이  일기처럼 솔직하게 그려져 있다!

 

 

 

1부에는 2002년부터 현재까지 여러 지면에 기고한 칼럼과 산문을 모았고,

2부에는 2000년에 출간되었다가 절판된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에서

생활의 냄새가 진한 글들을 골라 묶었다

 

 

 

소문난 스포츠광인 저자가 축구 관람 후에 쓴 단상들도 흥미롭다.

"그동안 한국축구는 한(恨)의 축구였다.

나라를 뺏기고 못 먹고 괄시받은 온갖 설움을 '슛! 골인'으로 풀려는 답답한 속내를 내가 왜 모르랴.

하지만 이제는 국력을 체력으로 증명해야 한다는 집단 초조증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그날이 곧 우리나라가 살고 싶은 나라가 되는 날일 텐데.

큰 경기에서 골을 넣으면 외국선수들은 팡팡 웃는데, 우리 청년들은 눈물이 글썽하다"

(19쪽,  이기기보다 즐기는 축구를...)

 

 

"괴로울 때나 기쁠 때나 늘 나와 함께 했던 일기는 나의 오랜 친구이자 연인이다.

그가 결코 날 실망시키거나 배반하지 않을 거라는 걸 나는 안다"

(134쪽,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

 

 

 

그전까지 돈에 관해 난 나름대로 철학을 갖고 있었다.

인생을 사는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즉, 많이 벌어 많이 쓰는 삶과

적게 벌어 적게 쓰는 삶.

 

많이 버는 것도 많이 소비하는것도

나처럼 게으른 사람에겐 너무너무 피곤한 일이라서

애초에 포기한 길이었다.

 

언제 훌훌 떠나도 좋게 짐을 만들지 않고 살자.

이게 그동안 내 삶의 모토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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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들어 부쩍 남들이 다 가진 걸 갖지 못하면

사는게 무지 피곤하다는 걸 알았다.

한국처럼 획일적인 삶을 강요하는 꽉 막힌 사회에서는

남들과 다르게 산다는 건 하나의 형벌일 수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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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제 모든 게 달라졌다.

 

세상과의 승산없는 싸움을 계속할 만큼

내 피는 더이상 뜨겁지 않고

그동안 수차례 깨지고 부서지며 철도 들었다.

 

지금 난 세상이 나를 이해하기를 감히 바라지 않는다.

세상이 내게 맞출리가 없으니

대신 세상에 나를 맞춰야겠다.

아니, 맞추는 시늉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냥 겉으로나마 남들처럼 적당히 살자.

 

적당히 얼굴도 내밀고

적당히 가벼운 인사말도 나누고

시비도 적당히 가리자.

 

그 "적당히" 가 과연 어디까지인지...

20세기가 가기 전에

 

내 집과 차를 장만하고자 하는 꿈에 부풀었던 올 한해..

동해안에 위치한 소도시로 이사온 지도 벌써 한달이 넘었다.

남들이 가진 걸 이제 나도 가져야겠다는 때늦은 자각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바빴던 한 해가 다 저물어가는 이즈음,

또 다시 난 이 모든게 부질없음에 절망한다.

 

눈부시게 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하루해가 꼴깍 넘어간다.

뜨겁던 정오의 햇살이 기운을 잃고 시들어져 어디론가 숨었다.

어디로 갔을까?

그 흔적이라도 석양으로 남지 않았을까?

 

정신을 차려 찾아볼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사방에 어둠이 깔려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영원하다는 자연도 그렇게 순간인데,

이 한 몸 스러지면

그까짓 아파트며 차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한동안 끊었던 담배를 다시 태우며, 나는 한 숨 짓는다.

(175-177쪽, 나와 거짓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