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C말~20C초 서양 예술가와 학자들을 매혹시켰던 여인. 루 살로메 (Lou Andreas-Salomé, 1861.2~1937.2) 니체, 릴케, 프로이트의 연인, 어머니, 마돈나 이었던 여인. 21세에 니체와 절망적인 사랑을 하였고 36세에 연하인 릴케와 진정한 낭만을 맛보았으며 50세에 프로이트와 애정어린 우정을 나눈 여자. 사랑하는 남자의 의식 세계에 직접 파고드는 비범한 능력을 가졌던 그녀 사랑이 폭풍우 같은 열정이라고 생각하였고 인생의 고통과 즐거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던 그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매력있던 그녀.
안드레아스 살로메는 1861. 2.21 러시아 성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구스타프 폰 살로메는 군인으로 최고 지위에 올라 있었으며 위로는 다섯 명의 오빠가 있었다.
아버지가 황제를 가까이 모시는 장군이었으니 부유하기도 하려니와
그녀의 아버지가 57세에 낳은 고명딸이라 루를 금지옥엽으로 키웠다.
그러나 자라면서 그녀는 점점 특유의 기질을 드러냈다.
루는 보통 귀족가문의 여자아이들이 즐기는 호화로운 드레스나 보석은 물론
파티 같은 일에 전혀 관심도 흥미도 없었다.
당연히 귀족학교의 수업도 시시하고 재미없어 받는 둥 마는 둥 하였다.
큰 키에 날렵한 몸매, 약간 튀어나온 넓은 이마, 깊고 빛나는 눈은 타고난 지성이랄까.
그 자태만으로도 돋보였다.
더욱이 남을 의식하지 않는 그의 거침없는 태도는 보는 이의 혼을 빼놓곤 했다.
살로메가 처음 청혼을 받은 것은 18세 때다.
42세의 유부남이었던 황실교사는 처자식을 버릴 결심까지 하고 살로메에게 청혼을 했다.
그녀의 관심은 더 많은 공부를 하는 것이었기에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
스위스 취리히 대학에 진학할 마음만으로도 바빴다.
당신은 어느 별에서 왔지요?
루는 취리히 대학에서 신학, 철학, 예술사 공부에 열중하다 건강을 잃었다.
각혈까지 하게 된 살로메는 남쪽의 로마로 휴양을 갔다.
그 곳에서 철학자 ‘파울 레’를 만난다.
둘은 로마 거리를 쏘다니며 주로 철학, 신학, 예술을 논했다.
그러던 어느 날, 레가 루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이에 루는 아직 사랑에 관심 없다고 잘라 말한다.
대신 남자 한 명을 더 보태 셋이서 공동생활을 하는 것은 괜찮다고 허락을 했다.
이 때 ‘레’가 스승인 니체를 소개한다.
루보다 16년 연상이려니와 여자들이 한사코 싫어하는 니체를 말이다.
그러니까 니체는 37살 레는 32살, 루는 21살이었다.
어쩜, 니체는 그녀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를 처음 보자마자 “우리가 어느 별에서 와 여기서 만나게 되었지요?”라며 꿈결처럼 빠져들었다.
이 말은 일파만파로 번져 꿈같은 연인을 두고 더러 떠올리는 유명한 말이 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니체는 정말 꿈을 꾸고 있었다.
어쩌다 루와 함께 산에 올랐던 것을 두고 니체는 내 생에서 가장 황홀한 꿈이었다고 뒷날 고백한다.
실제 니체는 루를 자기의 별장으로 초청해 그 곳에서 한 달을 같이 보내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레가 시름시름 앓았다.
그녀는 레와 함께 살았지만 청혼은 거절하고 동거 2년 뒤에 헤어졌다.
동침은 아니지만 동거를 하면서 지켜본 레가 너무 나약했던 것이다.
한편, 루는 존경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니체의 청혼도 거절했다.
니체는 그 충격과 분노를 책에다 풀어놓았다.
쓰기 시작한 지 열흘 만에 탈고한 책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다.
이 책에서 살로메를 이 지상에서의 이상으로 칭송하기도 했지만 남자들에 대한 충고도 잊지 않았다.
“여자에게 갈 때는 채찍 갖고 가는 것을 잊지 말라”고 말이다.
그의 실의를 알만도 하다.
그 후 얼마 뒤부터 니체는 정신착란에 빠져 10여 년을 광기 속에서 헤매다가 여생을 마쳤다.
left to right, Andreas-Salomé, Rée and Nietzsche (1882)
<1882년 니체가 파올 레와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와 함께 찍은 희귀 사진>
안드레아스와 결혼하다
레와 헤어져 베를린에서 하숙생활을 하던 그녀에게 새 남자가 접근한다.
외국에서 강사로 근근이 살아가던 41세의 안드레아스는 보통의 다른 남자들과 좀 다른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자기와 결혼해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며 가슴에 칼을 꽂고 쓰러지는 난동을 피워 얼결에 루는 결혼을 허락하고 말았다. 그녀의 나이 26세 때였다.
안드레아스는 57세가 되어서야 괴팅겐대학 교수가 되었으니 살로메는 그의 용기를 높이 샀던 것이리라.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안드레아스가 루의 생활에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43년간 이어졌다.
대신 루는 마리라는 하녀를 데려다 남편의 실제 아내 노릇을 하도록 해주었다.
이 사실을 안 ‘레’는 4년 동안 넋이 나간 채 이리저리 떠돌다 루와 정답던 시절을 떠올리며
산에 올라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남성 편력은 결혼을 하고부터 시작된다.
바람기가 발동했다기보다 많은 지성인들이 귀신에 홀린 듯 그녀에게 매료되었다.
그러다 대부분이 파멸의 길을 걸었지만 불후의 명저를 남기기도 했다.
그녀가 부른 사랑의 열병은 동시에 창조적 영감을 안겨준 영혼의 뮤즈라고나 할까.
의사인 사벨리와 피넬레스 신문편집자 레테부어 등과 여행을 함께 다니며
인생을 논하던 루 살로메도 어느덧 36세의 중년에 접어들고 있었다.
.
나의 누이여! 나의 신부여!
루 살로메가 36살 되던 해이다.
뮌헨대학에 다니며 시를 발표하고 있던 릴케가 그녀를 만난 것은 불과 22세 때다.
어느 문인의 집에 초청되어 갔을 때였다. 첫눈에 반한 릴케는 루에게 계속 편지를 보냈다.
“저는 기도하는 심정으로만 당신을 보았습니다.
저는 당신 앞에 무릎 꿇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만 당신을 열망했습니다.”
세계문학사상 가장 고매한 정신의 소유자로 일컬어지는 릴케마저 그녀를 평생토록 잊지 못하고 흠모한다.
릴케는 루 살로메부부가 처음으로 가는 러시아 여행에도 함께 갔다.
이후 두 번에 걸친 러시아 여행에서 릴케가 얻은 영감은 그의 시작(時作)에 일대 파란을 준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간 편지만도 릴케 사후 400쪽이 넘는 책으로 출간될 정도였다.
원래 살로메는 정신적 애인과 육체적 애인을 따로 구분해서 사귀었다.
그런데 릴케에게만은 좀 특별했다.
거의 4년여를 누이이며 연인으로서 릴케의 곁에 있었다.
결혼을 한 루가 14살이나 연하인 무명시인 릴케의 실제적인 아내나 다름없었다.
루는 릴케가 자신에게 최초의 육체적 실재였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이렇게 위험하고도 신비한 마성의 그녀는 릴케에게 결별을 통고했다.
그의 천재성이 이미 세인들에게 알려졌음에도 릴케가 너무 자기에게 의지하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릴케의 문학적 성숙을 위해 살로메는 그 곁을 떠나기로 작정한 것이다.
릴케는 루를 만나기 그 이전에도 연상의 가정교사와 사랑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리고 평생 여러 여인들의 배려 속에 작품 활동을 했지만 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여인은 루 살로메였다.
루를 향한 릴케의 사랑도 격정과 비극 그 자체였다.
릴케는 장미가시에 찔려 죽는 순간까지 이별은 했으되 가슴 속에서 루를 지우지 못했다.
Rilke with Lou Andreas-Salomé in Russia
with the poet Spiridon Drozin (1900)
내 눈을 감기세요
그래도 난 당신을 볼 수있습니다
내 귀를 막으세요
그래도 난 당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있고
입이 없어도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내 팔을 꺽으세요
나는 당신을 가슴으로 붙잡을 것입니다
내 심장을 멈추게하세요
그럼 나의 뇌가 심장을 고동칠 것입니다
당신이 나의 뇌에 불지르면
그때는 당신을 내 핏속에 실어나르렵니다
- 릴케가 '루 살로메'에게 보낸 글 -
그리고 그의 유별난 장미사랑이 시작된다.
릴케는 손수 장미를 심어 가꾸고 그 향취에 매료되고 사색하느라 거의 정원에서 살다시피했다.
어느 날 친구가 릴케의 집에 미모의 이집트 여인들을 데려와 소개를 해줬다.
릴케는 그 여인들에게 장미꽃을 꺾어 바치려다가 그만 장미가시에 손가락이 찔리고 말았다.
장미를 너무 좋아한 것이 화근이었을까?
사랑이, 열정이 식지 않는 가슴이, 손가락이 붉은 피를 뚝뚝 흘렸다.
그 때문이었을까? 장미를 찬미하는 시를 수도 없이 썼다.
뿐만 아니라 죽기 1년 전에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는지 유언장과 묘비를 직접 써 놓았는데
그 묘비에도 장미가 등장한다.
당연히 그의 영구차는 그토록 그가 좋아했던 장미꽃으로 수를 놓았고 묘비 둘레에도 덩굴 장미를 심어서
얼핏 낭만적인 그가 깊은 잠을 자기에 충분했으리라.
장미/ 오, 순수한 모순/ 그렇게 많은 눈꺼풀 아래/ 누구의 잠도 되지 않는 기쁨
릴케가 루 살로메를 잊지 못하고 그녀 대신 장미를 품었던 게 아닌가 한다.
장미가시에 찔려 사경을 헤매면서도 그에게 그녀는 이별할 수 없는 누이이자 지워지지 않는 신부였기에 말이다.
결국 릴케는 숨을 거두기 전에도
살로메가 보고 싶어 주변사람들에게 이렇게 사랑을 호소하였다.
“나의 그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루 살로메에게 좀 물어봐 주십시오.”
아무렴, 아무도 담담할 순 없었다. 살로메도 릴케가 클라라와 결혼하고 자기가 버린 ‘레’마저 산에서 추락사하자
무척 상심하여 심장병을 얻는다.
그 때문에 옛 애인 피넬레스를 찾아간다.
그에게 치료를 받으면서 두 사람의 애정관계가 회복되어 아기까지 생겼다.
아빠가 될 꿈에 부푼 피넬레스의 청혼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이혼할 뜻이 없음을 밝힌
살로메의 심중엔 무엇이 있었을까.
내 멜로디에 당신이 부여한 높은 옥타브
루는 남자들과 함께 있는 것을 즐겼음에도 결코 그들에게 얽매이기 싫어했다.
남자들이 원하는 것에 신경을 쓰기보다 온전히 자신의 창작활동을 통해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확대해 나갔다.
자유로운 영혼과 자유로운 현실을 원했던 것이다.
그러니 남성이나 가족의 굴레에 연연할 수가 없다.
마침 기존 도덕과 관습에서 탈피하고자 자아를 추구하는 여성들이 대두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남성들만이 하던 학문에 뛰어들거나 혹은 예술가가 되는 길을 찾았다.
자유연애는 이들이 던진 도전장인 셈이다.
그리고 루의 궁극적인 관심은 ‘생의 근원’이었다.
문학에서 그 해답을 찾지 못한 루는 지적 갈증으로 여행길에 올랐다.
그녀가 50세가 되던 해에 철학자 프로이트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된다.
이후 프로이트와 각별한 우정을 지속했다. 그녀야말로 사랑과 지성의 탐닉자였다.
루는 성은 본능이며 인간의 가장 귀한 욕구이며 성애와 예술적 창조,
종교적 열정은 생명력의 서로 다른 측면일 뿐이라고 파악했다.
그러므로 여러 남성들과 사랑을 나누며 그들을 정신적으로 고양시키기도 하고 한편으론 황량하게도 했다.
정신과의 비에레도 그렇다. 그는 살로메와 프로이트 사이를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을 뿐이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제자 타우스크가 살로메를 짝사랑하다 자살을 했는데도
루에게 연인이며 후원자로서의 역할을 평생토록 했다.
그녀가 생활하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지속적으로 경제적 도움을 주었다.
실제 프로이트의 서재에는 살로메의 사진이 늘 걸려 있었다.
그녀는 남편이 죽은 7년 뒤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결혼을 하고도 자유로이 떠돌았던 그녀가 이따금씩 남편을 찾았던 만큼 죽어서도 남편 곁으로 돌아갔다.
남을 의식하지 않는, 너무나 오랫동안 피부 밑으로 흐르는 여성의 수치심과 대치해온 것이리라.
자유를 향한 고군분투 말이다.
★☆ 추억을 더듬어 가면 내 마음의 그리움이 구름처럼 떠올라 보고품에 한없이 눈물이 쏟아질 때 추억을 더듬어가면 그대를 만날 수 있어 가벼운 설레임에 마음이 떨려 옵니다 그곳엔 서로의 마음이 하나 되면 아름다운 시절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나 그대를 사랑하기에 외로울 수 있습니다 그리움이라는 숲에서 사랑이 울고 내 마음의 숲에서도사랑이 웁니다 밀려오는 그리움을 홀로 달랠 수 없어 그대에게 달려가 오늘도 그날처럼 가슴벅찬 사랑을 하렵니다 글/용혜원
'▣ 기타 > 아세요?'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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