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좋은글·시-1

봄이 오면 나는 보라색 연필을 사러 간다 / 이기철

쥬 니 2010. 5. 12. 21:15

 

 

    

 

 

  

 

봄이 오면 나는 보라색 연필을 사러 간다  

                                                                         

                                                           - 이 기철 - 

 

낯 선 곳으로 편지를 쓰기 위해

봄이 오면 나는 보라색 연필을 사러 간다.

내가 쓰는 편지는 아무 곳에도 도착하지 않을 것임을 나는 안다.

 

그러면서도 나는 대문을 나와 골목을 지나 아무 데도 없을  상점으로

 보라색 연필을 사러 간다.

봄이 펴 놓은 색지가 걸어가는 내 발을 보랏빛으로 물들인다.

 

작년에 신던 나무의 신발이 작아 보인다

농구선구같이 물씬 커버린 나무에게 더 큰 신발을 사주어야 한다.

 

아침이 지나고 저녁이 와도

나는 보라색 연필을 사지 못할 것임을 안다.

연필을 사는데 일생이 걸릴 것임을 나는 잘 안다.

 

땅속에 묻힌 씨앗들에게 너희에게도 영혼이 있느냐 물으며

아직도 찾아가지 않은 세상의 약속들을 위해

설령 상점이 없다 해도

그 곁에서 나는 보랏빛 꿈을 꾸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내 쓰는 편지가 끝내 봄에게 부치는 편지였음을 

마지막 구절엔 일생이라는 끝말을 써 넣어야 함을 

나는 미리부터 안다.

 

꿈을 꾸는 것만이 꿈을 가꾸는 시간이라는 믿음에 밑줄 긋기 위해

나는 봄이 오면 보라색 연필을 사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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